이처럼 참의원의 몰지각한 행태는 민주주의의 열망에 젖어있었던 국민들과 언론의 많은 분노와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었다. 애초에 참의원 의원들의 구성 부터 참의원이 보수성을 띠게 했던 것이 이러한 국민적 여론을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4. 윤보선 대통령의 정치개입
정파적 이익을 노린 윤보선 대통령의 탓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당장 국무총리 지명에 있어서부터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의 정파적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그의 지명을 받은 사람이 바로 민주당 구파 출신이었던 김도연 의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민의원에선 이를 부결시켰고, 결국 신파 출신인 장면이 제2공화국의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하게 된다. 113)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의 정치개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개각과 관련하여 의원내각제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장면 내각의 인사정책에 대해 민주당의 구파 인사에게 주는 자리가 없다고 하면서 간섭을 하기도 하였 다. 이후에도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 입장을 대변하는데 앞장을 섰으며, 정치에 관여한다는 비판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표했다고 대응하는 등 자신의 행위의 정당화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 참석하고선, 당파 이익에 눈이 어두우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 라고 주장하면서, 장면 내각에 대해 거국 내각을 구성하라는 주장을 거리낌 없이 하여 장면 개각과 신파 의원들의 반발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윤보선 대통령은 자신과 같은 구파 정치인들을 청와대로 자주 불러 들여 모임을 가지면서, 장면 내각의 정책과 반대되는 성명을 내기도 하였으며, 명목상 그리고 의전상으론 국가원수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한 간섭으로 장면
113) 물론 여기엔 무소속의원의 표들이 당선 여부를 결정했던 점도 있었다. 김도연은 무소 속을 배제한 정당 중심의 내각을, 장면은 무소속을 배려한 거국 내각을 주장하여, 무소속 의원들이 장면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8월 19일에 장면은 재석 225명 중 찬성 117표, 반대 107표, 기권 1표로 당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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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제 개헌에 필요성에 관한 연구/이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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