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朝鮮土木事業誌, 1047∼1050쪽;全州府史, 689∼691쪽.
비고 : m는 1間을 1.818m로, 1尺을 0.303m로 계산하여 필자 첨가.
이 시기 전주의 도로개수 공사는 주로 국고 보조를 받아 지방비 사업으로 이루어졌 다. 공사비 예산은 1911년도에 19,150원, 1912년도에는 약 12,009원이 편성되었고, 그외에 유지 기부 환산액 5,190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 1911년도에 9,575원, 1912년도에약 8,770원이 국고 보조로 지원되었다. 이 때 전주의 간선 십자가로와 시내 주요 도로가 신설 혹은 개량되었다.
1911년 9월부터 1912년 10월까지 측구복개, 암거 공사를 포함하여 12건의 공사가 진행되었고, 실제 약 18,452원(국고보조 약 8,877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이 가운데 도로가 개수된 8건의 공사 구간을 보면 주로 전주시내 십자가로(남문광장, 북문광장, 동문광장, 광장서문)와 경무부, 재판소, 도청 등 지방의 행정기관 앞 도로의 공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11년부터 1912년까지 이루어진 공사로 전주 시내의 간선 도로 및 주요 시가도로의 틀이 갖추어졌다.
이어 1912년 8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이루어진 공사를 통해 서문 부근의 일본인 거류지역의 가로가 정비되었다. 이전 공사에 이어 서문-광장 간의 도로를 개수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도로공사가 일본인 거류지인 서문 근처에서 이루어진 것을알 수 있다. 주로 서문 근처 파출소에서 남문, 전주천 방향으로 도로가 개수되었다.
그리고 1911년에 훼철된 전주읍성 동쪽(남문동문북문)에 남아있는 석재를 제거하였 다. 이 때 공사비로 약 11,607원(국고보조 약 8,477원)과 기부 환산액 약 5,191원이 사용되었다. 186)
183)전주부사의 690쪽에는 8척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도로의 노폭에 맞춰서조선토목사업지 의 기재된 18척일 것으로 파악하였다.
184)전주부사의 691쪽에는 64칸으로 되어있으나 전주읍성을 둘레가 3,215m인 것으로 보아 읍성의 동반부 성벽을 철거한 터에 길이로는 짧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조선토목사업지에 나오는 640칸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어 기재하였다.
185)전주부사의 690쪽에는 단위가 척으로,조선토목사업지에는 단위가 칸으로 기재되어 있다. 1912년 서문파출소 부근에서 이루어진 공사 3곳이 같은 상황이며, 척으로 계산할 경우이 3척은 0.9m로 폭이 너무 좁다고 생각되어,조선토목사업지의 단위인 칸으로 기재하였 다.
186)全州府史, 689∼691쪽;朝鮮土木事業誌, 1047쪽.
- 39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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